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향곡 제10번(쇼스타코비치) (문단 편집) == 평가 == 5번 다음으로, 혹은 그 이상으로 쇼스타코비치 생전에도 그렇고 사후에도 굉장한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곡이다. 4악장의 '해피 엔딩' 에도 불구하고 곡 전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내향적이고 무겁다는 점이 옹호와 비판 양쪽에서 거론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옹호하는 쪽에서는 이 곡이 그 동안 소련 음악계에서 반영하지 못한 갈등 논리를 통해 극적인 긴장감을 조성하는데 성공했다고 했지만, 비판하는 쪽에서는 사회주의 사실주의 논리를 내세우며 인민의 낙관성과 긍정적 사고관을 해치고 있다고 반격했다. 음악적인 면에서 행한 비판도 여러 가지가 나왔는데, 2악장과 4악장이 너무 짧아 상대적으로 길고 비중이 큰 1악장과 3악장과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나왔다. 결국 이 곡을 둘러싼 ~~[[키배]]~~논쟁이 확산되자 소련음악가동맹에서 1954년 3월 말과 4월 초에 걸쳐 공개 토론회까지 열 정도였는데, 여기에는 쇼스타코비치 자신과 그에 대한 옹호파와 반대파가 모두 참석해 난상토론이 연출되었다. 이 토론에는 음악인이나 예술인들 외에 일반 대중들도 청중으로 참석해 곡에 대한 관심과 열기를 반영했다. 쇼스타코비치는 토론회 석상에서 주로 정치적인 비판 보다는 형식 상의 문제 같은 음악적인 비판에 대한 인정과 해명 위주로 발언했고, '내가 이 곡에서 묘사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감정과 정열이었다' 고 주장했다. 소련보다는 여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던 서방에서는 이 곡이 스탈린 시기의 폭거와 비극을 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했고, 이 주장은 소련 문화예술계의 획일성을 비판하는 데도 쓰였다. 여전히 소련 음악계의 요직들을 차지하고 있던 반대파의 공격력은 꽤 강한 편이었지만, 예전처럼 쉴드쳐주던 강한 지도자도 없었고 전체적으로 해빙기를 맞고 있던 소련의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역공격을 감수해야 했다. 결국 공식적으로 이 작품은 '낙관적인 비극' 이라는 애매한 평가를 받았고, 연주 금지 등의 조치 없이 계속 공연되고 녹음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작곡 당시부터 이 작품은 서방 음악가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받아온 작품이기도 하다. 이전의 7번 교향곡이 곧바로 유럽과 미국에서 연주된 것처럼, 이 곡도 초연 직후부터 서방에서도 연주되기 시작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특히 예브게니 므라빈스키의 쇼스타코비치 해석을 좋아해 자신이 따로 연주하거나 하지 않았는데도[* 다만 딱히 므라빈스키를 존중해서라기보단 반소련 감정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좋든 싫든 소련 음악계의 아이콘이었으니. 그러나 쇼스타코비치의 제자인 로스트로포비치와도 친밀했고 소련의 음악가들인 오이스트라흐, 리흐테르 등과 음악을 한 것을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듯 하다.] 유독 이 곡만은 두번이나 녹음하고 소련 연주여행을 간 1969년에는 작곡가 본인 앞에서 연주했을 정도. 쇼스타코비치도 연주를 그럭저럭 마음에 들어한 듯하다. 음악적인 면 뿐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측면에서도 꽤 강한 임팩트를 준 작품이라, 현재까지도 꽤 자주 공연되면서 지속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곡이다. [각주] [[분류: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